매일 이길 순 없지만 매일 잘하자…팬들에게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

⑧ 야구선수는 서비스직

[선동열의 야구, 이야기] 매일 이길 순 없지만 매일 잘하자…팬들에게

참 뜨거운 여름이다. 덥고 습한 7월, 모처럼, 두 번이나 잠실야구장에 갔다.

지난 12일 허구연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의 초청을 받아 LG-KIA전을 봤다. 김응용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 회장님과 나란히 앉았다.

야구인생의 대부분을 마운드나 더그아웃에서 보냈다. 관중석에서 야구를 본 것이 얼마 만이었는지 모른다. 투수들의 피칭과 타자들의 타격을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색다른 공부이자 기쁨이었다. 더 새로운 것은 팬들과 함께였다는 점이다. 사인 요청에 응하며 나도 즐거웠다.

지금의 나는 그저 야구 팬 중 한 명이다. 그러나 팬들에게 나는 그들과 같은 팬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추억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동열 선수’ 혹은 ‘선동열 감독’일 것이다. 내가 한 사인 하나로 그들은 또 추억 하나를 예쁜 액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참 뜨거운 함성이 들렸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알던 소리가 아니었다. 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전에는 응원하는 팀이 득점했을 때, 승리했을 때 팬들이 환호했다. 승부에만 몰입해 있던 나도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기려 이를 악물었다.

얼마 전 관중석에서 마주한 팬들은 달랐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응원했다. 그리고 야구장에 있는 시간 자체를 즐겼다. 무더위조차 눌러버릴 열정으로 응원하는 팬들을 보며 야구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나흘 뒤 다시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그라운드에 섰다. 올스타전 행사에서 KBO가 리그 4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레전드 40명 중 최다 득표자로서 팬들 앞에서 인사할 수 있었다. 고(故) 최동원 선배의 아들, 이종범 LG 2군 감독, 이승엽 해설위원과 함께했다.

내가 시구한 뒤, 포수로부터 유격수 이종범이 공을 받아 1루수 이승엽에게 송구하는 장면은 하이라이트였다. 다들 예전처럼 빠른 공을 던지지는 못했지만, 그 장면을 본 팬들은 시간여행을 떠난 듯 즐거워했다. 팬들의 박수를 받는 우리도 선수 시절로 돌아간 듯 가슴이 벅찼다.

선수 시절, 나는 항상 잘하고 싶었다. 꼭 이기고 싶었다. 감독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승자독식. 스포츠에서는 1등이 아니면 꼴찌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라운드를 떠나 팬으로서 TV 중계를 봐도 습관처럼 승부에 집중했다. 관중석에 앉아보니 야구가 더 크게 보였다. 승패만이 아니라 과정이 보였다. 팬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코로나19로 2년 가까이 관중석이 텅 비었을 때 선수들은 큰 허전함을 느꼈다. 팬들의 응원이 너무도 그리웠다고 했다.

팬 서비스에 대해 논할 때 자주 회자되는 말이 있다.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1990년대, 최희암 감독이 한 말이다.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봤냐?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데 이렇게 대접받는 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팬들한테 잘해야 한다.”

후에 이 말이 한국 스포츠 명언으로 꼽힌다고 하자 최 감독은 “당연한 말을 왜 명언이라 하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야구에도 득점 생산(RC·Runs Created)이라는 용어가 있다. 여기서 생산은 점수를 뜻한다. 크게 보면 승리다. 과연 이게 전부일까. 아니다. 득점도, 승리도 결국 팬을 즐겁게 하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프로 스포츠의 진짜 가치는 팬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는 것이다.

프로 선수는 ‘서비스직’이다. 사인을 하고, 사진을 함께 찍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프로 선수로서 품위를 지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구도 매일 이길 수는 없지만, 팬 서비스는 매일 할 수 있다.

불볕더위를 이기고 열렬히 응원하는 팬들을 보며 야구인들의 인식이 개선되기를 희망해보았다. 나부터 그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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