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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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사람의 우물 어떤 사회형태도 사람과 물자의 재생산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간 활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일’과 ‘사람을 돌보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로 나누어 볼 때, 자본주의에서는 둘의 관계가 다른 사회형태들과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사람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대상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형태에서는 사람의 일을 물건의 일보다 우선시한다. 사람을 향한 노동을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반대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마치 “물자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사회의 일차적 존재 이유인 것처럼 행세”한다(<역순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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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실패의 말 “그래서 지금 우리 깨우러 온 거예요?” 서울동부구치소에서 만난 청년은 그 한마디로 내 아름다운 말에 흠집을 내버렸다. 교도소에서 인문학 특강을 하던 중이었다. 그날 나는 중국 작가 루쉰이 <외침>의 서문에 썼던 ‘철방에 잠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절대 부술 수 없고 창문도 없는 철로 된 방.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모두가 곧 죽겠지만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루쉰은 물었다. 이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어쩌면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 어차피 살아나갈 방법도 없는 이들을 깨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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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노동자일 권리 노동절을 앞둔 4월30일, 10여명의 중증발달장애인 해고노동자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손팻말에는 “우리 일자리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충동과 내 글로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다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글이란 게 목소리를 담아두는 불멸의 그릇처럼 느껴지다가도 물 한 바가지도 담을 수 없는 깨진 옹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경우가 그렇다. 내 글로는 이날의 목소리를 담을 수가 없다. 몇번이나 고쳐 써보았지만 내가 쓴 문장들은 내가 들은 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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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나는 세월호를 몰랐다 <520번의 금요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그간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책을 펼치고 몇쪽 읽지 않았는데도 수문이 열리듯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 몰래 내 안에서 10년의 세월을 울고 있던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가만히 앉아서 문장을 눈으로 더듬어갈 뿐인데도 험한 고개를 넘는 듯 몇번이나 쉬어가야 했다. 우리가 어떻게 세월호를 모를 수 있겠는가.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가라앉던 세월호를 말이다. 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분향소 정면을 가득 채운 앳된 얼굴들,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정을 껴안은 채 청와대를 향해 걷던 유족들의 모습, 진도 팽목항에서 나부끼던 노란 천들, 사람들의 옷과 가방에 달려 있던 노란 리본들. 그뿐이 아니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드냐”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던 대통령, 비쩍 말라가던 유족들을 조롱하며 배달음식을 시켜먹던 사람들, 환청처럼 들렸던 ‘가만히 있으라’는 말까지. 우리가 어떻게 세월호를 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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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서울시청의 궤변론자 지난주 서울시가 ‘장애인 자립지원 절차’에 대한 개편안을 발표했다. 장애인 탈시설 절차를 새로 만든 것이다. 개편안에 따르면 탈시설을 원하는 장애인은 의료진 등에게 먼저 자립 역량을 조사받아야 한다. 그다음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립위원회가 해당 장애인에게 곧바로 탈시설을 허용할지, 적응 기간을 거치게 할지, 시설에 그대로 남게 할지를 결정한다. 탈시설 이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부적응자가 발견되면 재입소를 지원한다. 무슨 재소자 가석방 심사절차 같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 서울시는 권리의 이름으로 이 당연한 권리를 부인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장애인의 주거선택권’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문서에나 나올 법한 문장들이 속출한다. 제목은 ‘자립절차’인데 ‘시설입소’가 들어 있고, 퇴소의사를 밝힌 경우를 상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거부 결정을 ‘강제수용’이 아니라 ‘입소지원’이라고 쓰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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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노래를 만드는 공장 노래를 만드는 공장. 왠지 동화책 제목 같다. 그런데 이런 공장이 정말 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 유리로 덮인 작은 빌딩에 있다. 정확한 이름은 ‘노들노래공장’이다. 2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협업해서 노래를 매주 한 곡씩 만들어낸다. 주문도 받는다. 가사를 적어 보내면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고 직접 불러주기까지 한다. 공장 홈페이지(nonogong.kr)에는 이들이 생산한 음원과 악보가 공개돼 있다.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노동자들의 정체다. 이들 대부분은 탈시설한 중증발달장애인이다. 노래공장이 정말로 노래를 만드는 공장인 것처럼, 이들도 정말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다. 서울시의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지난 2년간 임금이 지급됐다. 이 지면에 몇 차례 소개한 것처럼, 이 사업은 노동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시책이 아니라 장애인이 ‘주체’로서 행사하는 권리이며, 그 형태도 비장애인 흉내내기나 보조하기가 아니라 중증장애인만이 해낼 수 있는 ‘맞춤형’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들의 노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공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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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어떤 동행 지난 연말 서울시가 재정을 투입해 만든 일자리에 종사하던 수백 명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시가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업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정리해고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리해고, 파업, 복직 투쟁.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흔히 들을 수 있는 뉴스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는 이 흔한 뉴스를 그대로 전하는 언론이 거의 없다. 기사에는 정리해고도, 파업도, 복직 투쟁도 없다. 간혹 이 말들을 쓰는 경우에도 당사자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식이다. 이들이 엄연한 임금노동자이고, 정리해고가 된 것, 파업에 돌입한 것, 복직 투쟁에 나선 것이 모두 사실임에도 그렇다. 이는 이들이 중증장애인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중증장애인이 무슨 노동을 하느냐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에 해고가 해고로 보이지 않고 파업이 파업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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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다시, 정상운행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시작된 지 만 2년 되었다. 아직도 지하철에서 그러고 있나 놀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 다만 2년 전 여당 대표가 ‘비문명적’이라고 비난했던 때의 시위, 그러니까 열차의 운행 지연을 야기했던 집단탑승은 시도도 못하고 있다. 장애인 차별의 현실은 심각하지만 시위 방식에는 공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바람대로 올 한 해 장애인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다. 국회의사당역 플랫폼에 가만히 앉아서 장애인의 권리를 외쳤을 뿐이다. 장애인들을 훈계했던 여당 대표가 자리에서 쫓겨난 일은 모두가 알지만, 장애인들의 지하철 행동이 너무나 ‘문명적’이고 ‘바람직한’ 형태로 전개된 나머지 현황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애써 찾아와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욕설도 예년 수준을 찾아가고 있다. 서울시는 아예 2년 전으로 돌아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까지 폐지해 버렸다. 이제 출근길 아침 공기는 2년 전처럼 선선하고, 비장애 시민들은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외침을 구세군 종소리처럼 부담없이 듣고 지나친다. 장애인 차별의 평온한 일상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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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미친식당 노동후기 “정신장애인의 노동을 함께 고민하면서 미친식당을 준비했어요.” 정신장애인 예술창작 집단 ‘미친존재감 프로젝트’의 손성연 기획자가 보낸 초대 문자였다. 곧바로 ‘가겠다’고 했다. 왜 노동이냐고 묻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고민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일차적 규정은 ‘노동할 수 없는 자’이다. 정신장애인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장애인고용실태조사(2021)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고용률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고용되는 게 고시에 합격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누군가의 눈에는 10%도 많아 보일지 모르겠다. ‘미친 사람이 일을 해요?’라는 말이 ‘지금 제정신이에요?’라는 뜻을 지닌 사회이니 말이다. 아마 고용된 10%의 사람들도 미친 채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친 채로는 노동은커녕 사회생활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는 소위 증상을 억압한 사람들, 미친 티가 나지 않는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안 된다면 집에서 지내야 하고 그것도 어렵다면 시설에 강제 구금된다. 신체장애인들은 ‘경사로’ 같은 것이라도 요구할 수 있지만 정신장애인의 경우엔 적합한 사회 환경을 요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친 사람에게는 말의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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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나는 노들의 학생이다 지난 금요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노들장애인야학(노들)에 다니는 학생들의 무상급식을 위한 후원 행사가 열렸다. 우리는 이 행사를 ‘평등한 밥상’이라고 부른다. 정부가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해주면 좋겠지만 노들은 정규학교가 아니어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노들은 정규학교가 장애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학교다. 정규학교에서 배제해놓고, 정규학교가 아닌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급식에서 배제하는 셈이다. ‘평등한 밥상’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기울어진 밥상을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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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지은이 이규식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후마니타스). 지난봄에 출간된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자 문제제기이다. 무엇보다 ‘지은이 이규식’이 그렇다. 서울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는 그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 6. 28. 혜화역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 그는 지하철역 리프트 추락사고 피해 당사자이자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해 싸워온 투사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 20여년간 계속되고 있는 이동권 투쟁의 출발점에 그의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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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거짓새들의 둥지 삶에는 몇 개의 변곡점이 있다. 내게는 2006년이 그런 변곡점들 중 하나이다. 연구자들의 공동체에서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내던 삶이 그때 틀어졌다. 그해 우리의 식탁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평택 미군기지 건설, 새만금방조제 공사에 관한 이야기로 뒤덮였다.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농부들을 내쫓고 집들을 부수는 모습, 새만금방조제 완성을 위해 갯벌 생명체의 마지막 숨구멍에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모습은 그대로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평생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공부한다는 게 뭔지 갑자기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어민들, 농민들, 이주노동자들, 장애인들. 그해에 참 많은 사람을 만났고,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의 내 공부 주제와 장소는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2006년에서 뻗어 나온 시간을 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