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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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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직권조사사건
진상규명 조사보고서

‘또 다시 그런 얘기를 하면 너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전옥주씨는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연행 이후 모진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오랫동안 침묵한다. 1996년 <신동아>에 쓴 수기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공개 증언 이후 집에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협박했다는 것이다. 협박받은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8년이 걸렸는데, 피해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피해자가 있었을까.

사실 전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씨가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려던 그때, 또 다른 피해자도 증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9일 학교에서 귀가 중이던 이 피해자는 군인 트럭에 납치돼 1시간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강간당했다. 피해자의 오빠는 1989년 청문회를 앞두고 5·18민주항쟁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 이지현을 찾아가 “동생의 사연을 공개해 한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야당 국회의원 등 관련자들은 만류했다. ‘쟁점 사안이 아니니 진상규명을 위해 시급한 것부터 하자, 아무리 흉악한 놈들이라도 그렇게까지 했겠느냐’는 이유였다. 그는 끝내 증언하지 못했다.

2018년이 되어서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보고 용기를 낸 김선옥씨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석방 전 수사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38년만의 미투’를 하면서부터다. 2020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직권 조사를 시작했고 지난해 말 드디어 16명의 피해자에게 “당신의 피해가 사실”이라는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국가기관이 과거사 성폭력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한 것은 처음이다.

협박과 외면을 딛고 피해가 ‘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6명의 피해자가 함께 용기를 낸 덕이 크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말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서로에게 ‘증언’이 되어 피해 사실을 견인했고, 이들이 겪은 일이 ‘집단적 경험’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플랫팀은 이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 16건의 5·18 성폭력 피해 사실을 정리한 페이지를 만들었다. 조사보고서 내용은 조사위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의결주문] 1. 이 사건에 대하여 '진상규명 결정한다'

보고서 전문 다운로드 링크

16명이 '함께한' 증언

피해자의 진술을 클릭하면 각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내가 어찌 살까? 앞으로 시집이나 갈 수 있을까?’ 한마디로 장래가 막막하고 캄캄했습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23번 피해자의 진술

저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를 보고 비로소 울었습니다. 가슴에 사선으로 난 칼자국은 집에 가서야 확인했습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24번 피해자의 진술

시댁에서 살며 모유를 먹이는데, ‘더러워진 젖’을 아이에게 먹인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모유 수유시마다 공포와 수치심,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7번 피해자의 진술

군인들 옷은 얼룩무늬였어요. 그냥 군인이 아니었어요. 얼룩무늬 군인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뒤로도 예비군 옷만 보면 울렁거려요.

도심 시위 진압 작전

1번 피해자의 진술

여동생은 5·18 검찰수사 때 검사에게 피해 사실을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아 이후 동생이 말문을 닫았습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4번 피해자의 진술

선배인 양○○ 언니에게 말하니 "너가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너만 내리게 한것 아니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고 벌레 취급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6번 피해자의 진술

제가 공수부대원의 옆구리와 제 가슴을 찌른 가위는, 가지고 다니던 응급처치용 가위입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5번 피해자의 진술

퇴원 후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무서워 바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양쪽 어깨의 흉터는 5∼6㎝ 정도나 되는데, 지금까지도 비오는 날은 쑤시고 아픕니다.

도심 시위 진압 작전

77번 피해자의 진술

진상규명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결론이 난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 다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당한 사람은 평생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잊을까, 절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곽 봉쇄 작전

14번 피해자의 진술

“오빠 말 순순히 들어야 니그 집에 좋게 갈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너그 여기서 죽어불 수도 있다. 여기서 죽어 불면 니그들은몰라, 아무도."

외곽 봉쇄 작전

82번 피해자의 진술

처참한 몰골을 보고 어머니는 ‘무슨 일 있었지?’라고 몇 번을 물어봤으나 ‘아무 일도 없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 이후로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외곽 봉쇄 작전

40번 피해자의 진술

지프차를 타려고 한 발을 들어 올리려 할 때, 날카로운 것이 엉덩이 뒤편에서 성기 쪽을 찔렀습니다. 그러다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국군통합병원 복도였습니다.

광주 재진입 작전,연행·구금·조사 과정

32번 피해자 이남순씨의 진술

‘잊어버리고 싶고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건의 피해 기록’으로 남기고 이제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을 돌보고 싶어 진상규명 조사 신청을 하였습니다.

광주 재진입 작전,연행·구금·조사 과정

181번 피해자 정현순씨의 진술

신혼 초 악몽을 꾸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걱정하던 남편에게 상무대에서 겪은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가, 그게 결혼 생활 내내 저의 약점이 된 걸 후회하였기 때문에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광주 재진입 작전,연행·구금·조사 과정

35번 피해자의 진술

가슴을 짓누르는 하나가 성폭력이었고 언론사 요청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으나 이후 여파에 대해서는 예상을 못했습니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전화가 오고 어느 날은 17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버리고 싶은정도로 우울증이 왔습니다. 그래서 광주를 떠나 서울로 가버렸습니다.

광주 재진입 작전,연행·구금·조사 과정

2번 피해자의 진술

지금 같았으면 내 발로 걸어서라도 갔을 텐데, 그땐 등에 난 상처와 붉은 피보다 얇은 상의가 벗겨져 사람들이 지켜보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광주 재진입 작전,연행·구금·조사 과정

25번 피해자의 진술

16명의 증언자에게 보내는 편지

증언자에게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부적절한 내용의 경우 삭제조치 될 수 있으며, 남겨주신 응원의 메시지는 경향신문 보도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부마 항쟁 때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2018년, 김선옥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자, 또 다른 피해자가 등장했습니다. 광주에 앞서 부산, 마산에서도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이 있었다며 도와달라고 연락한 것입니다. 이 피해자 한 명뿐이었을까요. 피해인지도 몰라서, 말할 곳이 없어서, 죄책감이 더 커서, 침묵으로 수십년을 버틸 수밖에 없었던 과거사 성폭력 피해자들은 아직도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여기엔 남성들도 포함됩니다. 2018년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 조사에서 한 남성 피해자는 “남자들에 대한 성희롱, 성고문도 있었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처음으로 합수단 수사실에서 받은 성고문 방식에 대해 진술했습니다.

오는 26일 활동을 종료하는 조사위를 대신해 경향신문 플랫팀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남기려 합니다. 피해 사실이 ‘증언’이 될 수 있게, 침묵해 온 목소리들을 기다리겠습니다.

한편 조사위는 1980년 당시 제7공수여단에 복무한 298명 중 29명의 진술을 청취했습니다. 계엄군의 진술을 통해 5월 18일 투입 직후 발생한 여성에 대한 강제 탈의가 대대장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18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싶은 계엄군이 있다면 아래 링크에 메시지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플랫이 당신의 증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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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메시지

"우리도 함께 끝까지"

'증언'자들의 용기에 '응답'한 독자들이 보낸 메시지

기사의 가치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기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기획을 쓰면서 특히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해 펴낸 조사보고서엔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으로 진상규명 결정된 사례 16건이 300페이지에 걸쳐 차례로 등장합니다. 무미건조하게 피해 사실만 나열했을뿐인데 이들의 진술엔 어떤 기사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아닌 역사의 증언자로서, 수십년간의 침묵을 깨뜨린 여성들이 함께 내는 목소리의 힘을 느꼈습니다.

기사에 충분히 담으려고 애썼지만 그러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처 기록을 남기기 전에 세상을 떠난 분들, 아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정신 질환으로 치료받고 계신 분들,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과거와 싸우고 계신 분들도 많다는 걸 압니다. 우리의 기사가 조금이라도 여러분을 어루만지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저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 김정화 기자

인터뷰를 할 때는 울지 않습니다. 사실에 대해 듣고 그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연습을 오래 했기 때문일 겁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던 취재였습니다. 언니가 집단강간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44년 만에 알게 된 동생의 아픔이 전해올 때 저는 질문을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제가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정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어졌지만 그보다 먼저 제게 들어온 감정은 ‘그저 슬픔’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들의 피해에 우리 모두 관심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슬펐고 그래서 고립되고 외로웠을 피해자들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습니다.

그저 잘 기록해서 기사로 전달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랫팀은 4월부터 5월까지 5.18 성폭력 피해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가 느낀 만큼 잘 전달하고 싶었지만 그만큼 잘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한 피해자 선생님이 “나는 기자님이랑 통화하면 기운이 나”라고 말씀하실 때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남은 인생 선생님이 더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다고,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우시다고 전해야 했는데 말이죠.

이번 아카이브는 국가의 첫 과거사 성폭력 조사에 대한 저장 공간입니다. 조사위의 기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피해를 말하지 못한 피해자들과 다른 과거사 사건들에도 중요한 기점이 되길 바랍니다.

| 임아영 기자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23번 피해자의 증언

"‘이런 일을 당하고 내가 어찌 살까? 앞으로 시집이나 갈 수 있을까?’
한마디로 장래가 막막하고 캄캄했습니다"

유형 : 도심시위 진압작전 - 작전 구역 도착 직후 강제 탈의

일시 및 장소 : 1980.5.18 수창초교 앞

성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진술

피해 이전의 상황

23번 피해자는 당시 21세로 광주시 ○○동 ○○○ 인근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 에서 부모님을 도와 일했음. 1980. 5. 18. 오전 10시경 광주시 서구 ○○동 ○○ ○ 부근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얘기를 나누다가 시내 쇼핑을 하러 혼자 나왔음.

수창초교 앞에서 충장로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중 군용트럭 2대가 멈추고 방탄철모를 쓰고 곤봉을 소지한 군인 100여 명이 “야! 우~~”하는 등 함성을 지르며 내리는 모습을 보았음. 무서워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충장로 쪽으로 걸어가던 중 광주일고 정문 쪽에 이르렀을 때, 조금 전 보았던 군인들이 피해자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음.

군인 중 한 명이 “도망가!”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듣고 공포에 질려 걸어가던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음. 직감적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음. 군인들이 지나가는 차량을 통제시키는 모습이 보였고, 당시 주위에는 차량 몇 대만 있고 통행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썰렁한 분위기였음

피해 사실

도망가고 있는데 3명 정도의 군인이 피해자에게 다가와 어깨와 머리, 허리 등 온 몸을 수차례 때리고 그중 한 명은 발로 가슴을 차 넘어뜨렸음. 살기 위해 축 늘어 져 죽은 듯이 있으니, 군인들이 다시 가던 방향으로 가버렸음.

몸을 추슬러 다시 도망가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이번에는 5~6명의 군인이 달려와 더 무자비 하게 곤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머리를 밟기도 했음. 당시 녹색 원단의 바지에 체 크 남방과 베이지색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바지를 먼저 찢었고, 다음에 재킷, 마지막으로 남방을 찢었음.

한 군인이 바지의 이음새 부분을 잡은 뒤 예리한 것으로 찢은 후 잡아당기자, 바지가 한순간에 벗겨져 버렸음. 대검은 아니고 면도날인지 작은 칼이었는데, 예리한 칼날로 바지 이음새와 솔기를 “착” 찢고 옷 을 잡아당기니 한 번에 찢어졌음. 이후 재킷 뒤쪽의 양쪽 솔기 부분을 찢어 상의까지 벗기려 하여 안간힘을 썼음.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고 군인들은 남방까지 찢어버렸음.

피해 이후

폭행을 당한 후 쓰러져 있는데 지나가던 50세가량의 아주머니가 피해자를 부축해 광주일고 정문 앞에 세워진 버스에 숨겨주었음.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상태로 버스에 오르자마자 웅크리고 있다가, 한복 입은 할머니가 보여 ‘한복 속치마’ 좀 벗어달라고 부탁했음.

버스에 있던 아저씨가 ‘손녀처럼 생각해서 옷을 좀 벗어주 시오’라고 거들어 주어 할머니가 위아래가 붙은 (원피스형) 속치마를 벗어줌. 군 인들이 지나가자 다시 버스가 운행되었고, ‘아세아극장’ 앞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친구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음.

친구의 연락을 받고 어머니가 찾아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귀가함. 당시 살던 집이 철도를 지나 한참 들어가는 곳(도보 15분가량)에 있어 중간에 리어카를 타고 집에 가야 했음. 어머니가 철도 앞 가게에 세워져 있던 리어카를 가져와 피해자를 태우 고 집까지 끌고 간 것임.

사건 후 후유증과 2차 피해에 대한 진술

신체적 후유증

사건 후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전신 만성통증에 시달림: 결혼 이후 에도 온몸이 쑤시고 두통과 허리통증이 지속되어 정기적으로 약을 사서 복용했음. 임신 중에도 통증이 지속되었으나 약을 끊고 온몸의 통증을 견뎠음. 임신 중 좌측 난소에 혹이 생겨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산모의 건강상태와 아이를 낳은 후 결과 를 보면서 수술하자’고 함.

성 재생산적 건강권의 심각한 침해: 출산 이후에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두통과 허리통증이 심해 장안평 약국에서 정기적으로 약을 조제해 복용함. 또다시 임신하 게 되었을 땐 기형아라도 낳게 되면 어쩌나 걱정되어 1990년 가족도 모르게 복강 경 수술(난소낭종 절제술)을 받음.

신체적 후유증

사건 후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전신 만성통증에 시달림: 결혼 이후 에도 온몸이 쑤시고 두통과 허리통증이 지속되어 정기적으로 약을 사서 복용했음. 임신 중에도 통증이 지속되었으나 약을 끊고 온몸의 통증을 견뎠음. 임신 중 좌측 난소에 혹이 생겨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산모의 건강상태와 아이를 낳은 후 결과 를 보면서 수술하자’고 함.

성 재생산적 건강권의 심각한 침해: 출산 이후에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두통과 허리통증이 심해 장안평 약국에서 정기적으로 약을 조제해 복용함. 또다시 임신하 게 되었을 땐 기형아라도 낳게 되면 어쩌나 걱정되어 1990년 가족도 모르게 복강 경 수술(난소낭종 절제술)을 받음.

제가 그때 받은 충격은, 제가 그 몰골로 연행된 곳이 ○○ ○○ 학교였다는 사실입니다. 학생들 이 축구나 하던 운동장에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 저와 같은 대학생들을 연행해 구타하고 옷을 벗기며 욕설을 퍼붓던 모습 말입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를 보고 비로소 울었습니다. 친구 조○○도 제 모습을 보고 너무 충격 을 받았나 봅니다. 당시 조○○가 제 등에 묻은 피를 보면서 칼자국도 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 다. 가슴에 사선으로 난 칼자국은 집에 가서야 확인했습니다. 양복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는데, 다음날 깨어나서 양복을 보니 군데군데 피범벅인 상태였습니다. 제 몸에선 그렇게 많은 피가 나 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핏자국은 제게 옷을 건네준 사람의 피였을 겁니다.

저는 1980년 10월 22일 오전 자취방에서 친구 조○○와 집을 나서려다 연행되었습니다. ○○경 찰서에서 2명의 형사가 저희를 연행하러 자취방에 온 건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최후진술서 를 유인물로 작성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5·18을 겪고 보니, 신군부가 자신들이 권력을 잡 기 위해 김대중을 내란사건 수괴라며 억울하게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피해 사실 발화 이력과 동기

제2차 보상신청

1차 때는 총에 맞아 죽은 사람에 비해 큰 피해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남편에게 처녀 때 입은 피해를 숨기고 싶어 신청하지 않았음.

2차 때는 생계가 곤란해진 상황이었는데, 오빠가 도움이 될 거라고 권유했고 역사 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 여겨 신청하였음. 이때 도심에서 알몸 상태가 된 피해도 신고하였지만, 남편에게는 구타당했다고만 하였음.

기타 1급 판정을 받음.(1994)

5·18 성폭력 피해 유형: ‘성적 모욕 및 학대’에 해당함.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시리즈

말할 수 없던 ‘5·18 성폭력’…서로의 ‘증언’이 되어 “함께 끝까지”

“목포에 나같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산다고 해서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김민숙씨(가명)는 1980년 당시 쌍둥이 아기 엄마였고 임신 3개월의 임신부였다.

44년 만에 ‘사실’이 된 피해…1989년, 1996년에도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검사도 그런 일을 당했다는데 나도 이제 말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첫 번째로 용기를 낸 이는 김선옥씨였다.

한 명의 ‘기억’은 다른 피해의 ‘증언’이 됐다

지난해 말 5·18 성폭력 사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린 조사위의 큰 성과는 과거사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방식의 새로운 기준점을 세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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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들

이아름 플랫팀 기자 [email protected]

임아영 플랫팀 기자 [email protected]

김정화 플랫팀 기자 [email protected]